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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특별법의
개정 및 폐지에 앞장섭니다.
 
 
 
 


매춘부 옹호하기 / reds승준의 반란과연대 2005-01-04 14:26:10    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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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5



*나는 ‘매춘부’와 ‘성노동자’를 혼용하면서 썼다. 그리고 ‘매춘’이나 ‘성매매’ 역시 혼용하면서 썼다. 그렇게 혼용한 것은 그 각각의 개념적 의미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현재의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산업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성노동자들의 주체성에 대한 연구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그리고 성산업과 가부장제라고 하는 체제와의 구체적인 연관관계에 대한 분석도 전무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에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은 극히 상반되고 검증할 수 없는 통계와 설문조사이다. 나 또한 기본적인 ‘관점’의 제시나 ‘문제의식의 단상’에 머무르고 있다. 이런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 글을 쓴다.


‘성매매 방지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성매매 행위에 대한 강력한 단속과 처벌의 의지를 밝혔다. 일부 페미니스트 그룹은 이 법안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는 남성’에게는 더욱 가중된 처벌을, 그리고 ‘파는 여성’은 ‘성매매 피해 여성’으로 규정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성을 파는 여성은 여성에게 불리한 것으로 작용하는 경제적 관계, 그리고 가부장제 문화 때문이므로 이 여성들이 바로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법은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벌하고, 파는 사람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은 것은 형평성의 측면에서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벌써부터 대립을 형성하고 있다. 이 와중에 지방 곳곳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자살하는가 하면, (포주들에 의해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성노동자들의 대규모 항의집회가 있었다. 이 어수선한 상황과 분란들은 성매매를 둘러싼 격한 논쟁들이 향후 전면적으로 분출되어 나오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케 해준다. 나는 여기서 성매매 방지법을 옹호하거나 환영하는 페미니즘 진영의 이론적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성매매 방지법을 거부하고 매춘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성매매를 재정의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투쟁의 모색을 제안할 것이다.

다른 모든 노동력 매매와는 다르게 유독 성매매는 왜 범죄인가?

페미니스트 진영이 성매매 방지법을 옹호하고 그것을 입안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들이 성산업을 통해 여성에 대한 성적 서비스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공적․사적 권력의 확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여성을 남성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는 것을 즉, 가부장제를 문화적으로 재생산해낸다는 것이다. 또한 성을 사고파는 것은 육체를 사고파는 것이며, 그 육체가 타인의 성적서비스를 위한 도구가 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고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성산업과 성매매를 ‘범죄시’하고 이것을 척결하기 위해 싸우는 데에는 일차적으로 이런 이유가 있다. 성매매를 다른 여타의 경제적 교환행위나 그 관계들과 다른 특수한 것(가부장제 체제의 재생산)으로 정의하려는 것은 타당한 일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재생산 측면에서의 접근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적 서비스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부장적 문화를 재생산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미용서비스와 관련된 행위들이나 식당에서의 서비스 행위들, 전문적인 육아 행위들, 그 외 치료나 마사지와 같은 서비스 행위들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들의 대다수는 여성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행위들을 범죄시하지는 않는다(이런 서비스 노동들도 예전에는 범죄화했던 사례들을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용서비스를 성적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 노동에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 자체가 다른 서비스 노동과는 다르게 유독 가부장제 문화를 재생산하는 것이라 보기 어렵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런 활동들에 대해 성 역할을 고정시키는 지배적인 문화 규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타의 서비스 활동에 남성들이 점증하는 것처럼 성적 서비스를 판매하려는 남성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지배적인 성 역할을 나누는 문화규범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성매매를 없애면 성폭력이 증가할 것이라는 범죄학적 논리나 성매매의 존속이 성폭력 문화를 재생산한다는 성매매 방지법의 논리가 도덕적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일반화의 오류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비례관계가 어떻든 성매매와 성폭력은 대단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인데, 나에게는 이것이 영화 속의 폭력이 폭력을 양산한다는 논리처럼 혹은 그 반대로 영화 속의 폭력이 현실의 평화를 유지하게 해준다는 논리처럼 인정하기 어렵다.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노동력 매매와는 다르게 ‘성매매는 육체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해진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 성매매는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지 육체를 파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육체를 판다고 하는 인식이 성립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 되는 것일까? 페미니스트들은 그 이유를 성적 활동의 특성에서 찾는다. 성적 행위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직접적인 육체성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성매매에 있어 구매자에게 판매자가 자기 육체를 제공하면서 직접 대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육체를 판다는 인식이 성립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찬가지로 매매에 있어 육체성이 밀접하게 결합될 수밖에 없는 미용서비스들, 치료나 마사지처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비스를 파는 것에 대해 육체를 판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매매에서 특수하게 육체를 판다는 인식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 바로 미용서비스들을 비롯해 예로 든 서비스들은 불법이 아니지만, 성매매는 불법이라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성매매에 있어서 전근대적인 고용관계가 존속하는 것이나 인신 구속적 육체의 예속상태가 가능한 이유는 성매매를 불법화한 제도의 결과이지 성노동에 내재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주노동자들의 육체적 구금상황이 그들을 불법화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지 이주노동 자체의 내재적 본질이 아닌 것과 같다.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가 여성에게 질병, 불명예, 신체적이고 심리적인 학대, 그리고 정서적 고통과 같은 특별한 위험을 내포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에 따르는 결과가 아니라, 성매매를 불법화한 제도가 만들어놓은 현실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매매가 다른 서비스 활동과 마찬가지로 불법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인신 구속적 강제노동의 현실은 상당부분 타개할 수 있는 것이다.

성매매에 대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모, 매춘에 대한 근대적 패러다임 : ‘다른 건전한 일자리’의 논리

사회가 성매매를 전면적으로 범죄시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공교롭게도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은 자본주의체제나 사회주의체제는 성매매에 대해서만큼은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 산업자본의 축적을 위해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운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던 사회의 지배계급은 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는 노동인력을 ‘기생적’인 존재로 바라보게끔 선전하고 교육했다. 그 중에서도 매춘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으며 사회의 생산성을 갉아먹고 그것에 기생하는 범죄행위의 단연 으뜸으로 취급되었다. 노동력이 공장으로 흡수될수록 그리고 노동인력들의 대규모 이동에 따라 그 주위에는 항상 ‘매음굴’이 번성하게 되었다. 집창촌의 번성은 노동인력에게 특히나 젊은 노동인력들에게 ‘건전한 노동의식’을 고취시키지 못하고 그것을 갉아먹는데다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장소인 ‘가정’을 위협했다. 즉 매춘은 노동자가 다시 노동을 할 수 있게끔 강제하고(예나 지금이나 ‘가정’은 노동자가 다시 노동을 하게끔 강제하는 가장 탁월한 제도이다), 노동인력 관리의 안정화(사회에 만연한 전염병은 노동인력의 공장이탈의 중대한 변수였다. 초기 자본주의에서 ‘성병’은 노동자를 공장에서 자주 이탈하게 만들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성가신 것이었다)를 기할 수 없는 ‘위험요소’였다. 이에 따라 집창촌은 지배계급에 의해 온갖 전염병들의 근거지로 묘사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가 원한 것은 성매매를 최소화하고 그 ‘기생적’인 존재들이 생산적인 자본축적에 동원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학자들은 매춘부들을 강제노동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이념을 실현시킨 것은 사회주의였다. 과거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체제는 성매매를 불법화하고 집창촌을 강제로 해산시킴과 동시에 그곳의 성노동자를 생산인력으로 만든다는 목적아래 강제노동수용소와 같은 재활교육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해서 성노동자들은 기생적인 존재이자 온갖 병균들로 감염된(그들의 정신마저 병든) 범죄자가 되었다.    

성매매를 범죄시하는 것에는 바로 이런 산업노동자들에 대한 지배계급의 찬미와 자본축적을 위한 생산적 노동에 대한 배타적 규정들, 노동인력의 관리체계와 교육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맑스조차도 <자본론>에서 자본축적의 입장에서 ‘상대적 과잉인구’를 논하는 자리에서 매춘부들을 노동인력의 가장 최하위인 정체적 과잉인구로 논하며 기생적인 존재로 묘사했다. 맑스는 ‘상대적 과잉인구’에 대한, 그들의 사회적 생산에서의 역할과 저항의 힘에 대해 별다르게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점이 바로 산업노동자에 대한, 그리고 노동에 대한 오랜 신화를 존속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매춘에 대한 범죄는 이렇게 지배계급에 의해 고안되었으며 자본주의에서나 사회주의에서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고, 법에 의해 최종적으로 그들에게 범죄자라는 차별의 사회적 낙인을 찍게 되었다. 다른 한편 몇몇 국가에서는 ‘공창제’를 도입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기생적인 이미지)에 근거하고 있으며 ‘필요악’이라는 논리에 따라 국가통제의 필요성에 의해 제기되었다. 이는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사회문화적으로 강화하면 강화했지 그것을 철폐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일과 활동이 사회의 ‘필요악’이라는 부정성으로부터 그 자신의 활동이 규정당하고, 그 낙인을 달고서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된다고 생각해보라. 성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의 고리를 끊고자 성매매 금지를 강화하는 법률을 환영하는 것은 본의 아니게 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오늘날 성매매에 대한 규정과 논의들은 위의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담론과 비교해볼 때 거의 변한 것이 없다. 성매매 방지법을 옹호하는 한 여성운동가는 TV토론에서 성산업의 규모가 연간 24조억원에 달하며, 성산업을 없앤다면 이것이 ‘생산적’인 산업에 투자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편 성매매 방지법을 옹호하는 다른 논자들은 집창촌을 해소하면 여기의 성노동자들이 다른 ‘건전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사회의 물적 자원을 통해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인식의 밑바탕에는 여전히 매춘부는 건전한 직업과 일이 될 수 없고, 그 활동이 기생적이라고 하는 점을 전제하고 있거나 그런 지배적인 규범과 담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산업이 성을 상품화하고 여성을 쾌락의 도구로 만든다는 것을 이유로 그것의 상품화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차별을 문제 삼는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닐지라도 이 주장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건전한 노동인력과 그렇지 못한 노동인력이라는 차별적 전제를 당연시한다. 우리는 매춘이라 불리는 활동이 기생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 비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성노동자의 존재가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성문화를 재생산한다는 근거도 좀 더 세심하게 분석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결혼’을 가부장 제도의 일환, 숨겨지고 은폐된 ‘매춘’의 형태 그리고 노동력 재생산을 관리하는 지배적인 제도의 일환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혼에 대하여 그것이 전적으로 지배적인 가부장제 문화를 재생산하고 지배적인 경제적․사회적 착취구조에 투항하지 않을 가능성 즉, 전복적인 새로운 커플들의 계약관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듯이 말이다. 바로 저항의 힘, 그리고 성적관계와 그 계약에 있어 전복적인 새로운 관계로 그것이 나아갈 힘이 성매매(성노동 관계)에 없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힘(맑스에게서 산노동의 힘인 이 전복적인 요소, 전복적인 주체성들)이 없다고 단정 짓는다면 우리는 저항을 포기하고 그저 시스템에 종속된 영원한 ‘피해자’에 불과해질 것이다. 그 힘은 다른 모든 일자리의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노동자들에게도 있다. 성매매가 아닌 ‘다른 건전한 일자리’에는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가? 남녀차별이 존재하지 않는가? 성희롱과 성폭력이 존재하지 않는가? 오히려 ‘다른 건전한 일자리’들 속에서(공장, 사무실, 가정 등등) 여성들은 성적 서비스를 거의 ‘공짜’(무임으로)로 제공할 것을 요구당하고, 자의든 타의든 제공하고 있으며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우리가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많은 여성들이 소녀시절에 ‘창녀가 되고 싶다’고 종종 피력하는 반항적인 욕망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적서비스를 제공하는 성노동자들의 일부 그리고 전문적인 성노동자가 아님에도 일시적으로 성적서비스를 대가로 상대에게 돈(심리적 신체적 예속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나 암시로 쓰이는-소극적인 자기가치화의 표현이자 자기결정권의 표현)을 요구해보았던 여성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상대적 ‘우월감’과 ‘자긍심’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비물질적 노동과 성노동자

‘다른 건전한 일자리’와 ‘성매매’를 분리시켜 이해하려는 것은 성매매가 본질주의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편견을 강화한다. 자본이 지배하는 곳에서 모든 노동력은 상품으로 자신을 팔아야 할 운명에 처하고, 이 운명은 ‘건전한 일자리’이든 ‘성매매’이든 다르지 않다. ‘다른 건전한 일자리’의 노동자들이 무조건 복종적이기만 하거나 피해자이거나 예속적인 존재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본을 이용하기도 하며 착취에 대항해 투쟁하고 삶을 위해 투쟁하듯이, 성산업의 노동자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오히려 성산업속의 노동자들은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 문화를 전복시키거나 지배적인 성적관계와 성문화를 바꾸어 내거나 현재 인간들이 맺고 있는 커플들의 계약관계를 해체하고 좀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들은 성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것을 가르칠 능력이 있으며, 성병을 예방할 수 있는 지식을 활용할 수도 있고 점증하고 있는 정서적․감성적 재화에 대한 사회적 필요를 제공할 전문적 능력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노동과 서비스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자신들의 활동을 사회적 관계에서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자율적인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착취하는 것이야말로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가 ‘매춘부’라는 용어를 피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여성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경제적 교환관계의 피해자, 희생자여서가 아니다(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우리 모두는 스스로 원해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용어를 피하려는 것은 그들의 주체성이 지닌 다양한 전복적인 힘을 인식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활동이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가정으로부터, 사회적 생산에 기생하는 활동에 불과하다는 규정으로부터 주체성을 구해내기 위해서다. 탈산업적 사회에서 우리는 매춘의 확대와 더불어 노동의 일반적 매춘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이것은 현상적으로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황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우선 매춘은 집창촌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매춘은 구석구석에 침투해있다. 또 하나 포스트포디즘 체제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전반적으로 하락하여 노동은 인신 구속적이며 신체착취적인 ‘매춘’에서의 상황과 흡사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청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을 보라. 이것이 ‘다른 건전한 일자리’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상황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토니오 네그리를 비롯한 아우토노미아 운동에서 제시한 ‘일반적 지성’과 ‘비물질적 노동’의 개념은 이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준다. 맑스는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면 생산은 더 이상 노동력이 아니라 일반적 지성에 의지한다고 언급했다. 사회적 생산은 노동의 비물질적 노동으로의 전환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협력의 총체인 ‘대중적 지성’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비물질적 노동은 지식만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재화를 만들어내거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는 활동,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과정 그 자체에 참여하고 연결된 활동 전체를 의미한다. 사회적 생산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과정 그 자체가 되어감에 따라, 생산이 사회적 협력 속에서 산출되는 대중적 지성에 의지함에 따라 생산성을 측정하는 객관적 가치척도였던 노동시간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자본의 착취는 공장에서만 진행되지 않고 사회적 네트워크의 어떤 마디, 어떤 부분을 수탈해간다. 지적재산권처럼 사회적 협력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의 확립을 통해 그렇게 한다. 그래서 사회적 적대는 전통적으로 노동운동의 아젠다인 임금을 둘러싼 모순과 갈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에 있건(공장에 있건 그 바깥에 있건) 대중적 지성과 사회적 협력 속에 참여하여 만들어내는 생산과 그 부에 대해 모호한 척도들(고용의 여부, 노동시간 등등)을 들이대어 측정하거나 분배하는 것, 그리고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를 둘러싸고 형성된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이런 맥락 속에서 보면 비물질적 노동의 확대와 매춘의 확산은 긴밀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성매매에 접근하는 페미니즘 논쟁 속에서 두 개의 주요한 관점의 차이를 알고 있다. 하나는 성매매를 다른 여타의 경제적 교환관계와 똑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이것은 성산업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를 회피하면서 성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그리고 보다 생산적이라고 생각되는 일자리로의 전환에만 관심을 둘 것이다: 창녀들이여, 여공이 되어라!)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억압적인 가부장제 문화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것은 성노동을 도덕적으로 수용할만한 노동영역에서 배제하려 할 것이다)이다. ‘비물질적 노동’의 개념은 이렇게 생산의 영역과 문화의 영역으로 분리된 두 개의 관점을 혹은 생산과 소비, 생산과 비생산, 정치와 경제 등등으로 분리된 이분법적 관점을 극복할 수 있는 분석 틀로써 유용하다. 우리가 성적 서비스를 포함한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재화를 필요로 하고 그것을 제공하고 제공받는다는 것, 그런 재화를 생산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사회적 교류,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은 성적 교류, 정서적 유대, 감성적 교감을 보다 사회화하고 확산하는 경향(그것을 여전히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과 다르게)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만남의 네트워크’나 ‘이성․동성 교제의 네트워크’들이 성적 필요만을 배제하고 다른 필요를 위해서 만이라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이러한 활동, 그리고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재화의 생산이 바로 비물질적 노동의 하나, 대중적 지성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내가 이것을 비물질적 노동의 하나라고 말하면서 고급 콜걸이라 불리는 계층의 호화로운 활동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 서비스를 생산하는 활동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두고 싶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들은 오늘날 다른 비물질적 노동과 마찬가지로 생산 네트워크 내부에 기능하며, 그것을 생산하는 존재 또한 오늘날 일반화된 불안정한 ‘자영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그 활동이 비록 ‘상품화’에 예속되어 있다고 해서 그 활동에 생산적 역능이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나아가 ‘다른 건전한 일자리’에서처럼 그런 예속을 거부하고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잠재성이 없다고 전제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런 활동의 잠재력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그 활동을 ‘비공식경제’ 영역으로 놔둠으로써 불평등을 심화하고 착취와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성노동자 합법화에 대한 제안

호주의 페미니스트 바바라 설리반은 ‘매춘을 다시 생각하기’(<행동하는 페미니즘>, 지구문화사)라는 글에서 매춘을 ‘범죄화’하는 것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최소한 페미니스트들은 매춘에 대한 절조있는 반대성명을 내는 일을 삼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춘부들의 의지와 기능을 역설하고, 남성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강조하고, 여성이 매춘에서 그들의 육체를 판다는 개념을 거부하고, 매춘 거래행위 형태를 바꾸는 그러한 매춘에 대한 페미니스트 설명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담론적 전략은 매춘 여성들이 현재 구현하도록 강요당하는 종종 파괴적인 담론들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것은 남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성애 형태들을 구현하도록 요구하여, 남성 고객이 되는 경험 또한 변화시킬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담론적 전략은 또한 여성, 성차, 그리고 성애에 대한 ‘정상적’인 이야기 방식들을 변형시키고자 기획하는 좀더 광범위한 페미니스트 계획에도 기여할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개략적인 투쟁의 요구안을 생각해본다.

성노동자는 합법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포주를 국가로 대체하는 ‘공창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성노동의 자율성이 전면적으로 보장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성노동자는 인신 구속적 상황과 포주의 착취로부터 벗어나 보다 쾌적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노동할 권리가 있으며 투쟁할 권리가 있다.

그들에게 씌워졌던 ‘빚’은 사회가 그 일을 범죄시하면서 발생했거나 강제된 형태로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청산되거나 탕감되어야 한다. 또한 성노동자가 반드시 어느 특정한 장소와 사업장에 고용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성노동자는 자영 프롤레타리아트로써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 적합하고 안전한 장소(예를 들면 자기 자신의 집)에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성노동자는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자율적으로 통제할 능력과 권리가 있다. 따라서 성노동자는 독립, 건강, 안전에 대해 보통의 시민이 갖는 권리를 갖는다. 그들의 건강이 특별히 국가에 의해 관리되거나, 그가 여성이라면 모든 여성이 성폭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에서 그들의 직업을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성노동이 자유로운 노동이 됨에 따라 그에 반하여 성노동자를 감금하여 착취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하며, 성노동자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조건과 상황에서의 노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또한 성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자조집단, 자영집단 등 다양한 조직의 결사와 집회의 자유, 성의식을 변화시키는 교육과 문화․공연 활동을 행하거나 조직할 수 있으며(이것은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합법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치적 공간에서 그들의 요구를 담는 집단적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출처: reds승준의 반란과연대 http://Redsboy.zio.to copyleft since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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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과거사 해결 위해 강제성 개념을 ‘전시기’에 국... 2022/08/01
윤석열 정부는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공동위 기록을 공개... 2022/07/21
윤석열 정부는 징용보상 추가 요구 배후 단체와 단절해야 2022/07/06
정부는 종북세력의 정치조형물인 징용상을 철거하라! 2022/06/23
나눔의집-공익제보자 소송 난타전과 반일 프로파간다 은... 2022/06/12
[페미종언] 페미들의 전성시대 그리고 그 후 2022/06/21
국수주의 광풍 앞에서 바이든이 온다고 해결되나 2022/05/02
[인권단평]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앞에서 이상한 사... 2022/03/31
[운동단평] 우루과이 12년의 밤, 그리고 한국의 민주... 2022/02/22
나쁜 페미니스트 권력자 한 사람만 있어도 제도가 다 망...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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